우리나라와 외국의 모든 소설을 통틀어 단연 으뜸은 토지이다. 각종 고전 문학을 많이 읽어본 사람으로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여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 책이 훌륭함을 의미한다. 특히 슬픔을 표현하고 승화하는 박경리의 문장은 다른 어떤 책들도 따라갈 수가 없다. 단지 책이 장편이라 대작이 아닌, 인간의 심리와 삶을 잘 묘사해서 가슴이 매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대작인 것이다.
2권에는 '수동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매우 애착이 가는 인물이다. 수동이는 최치수 집안에 머슴이다. 수동이에게는 꿈이 있다. 노비에 불과하지만 같은 여자 머슴인 귀녀와 혼인해서 아이들을 낳고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하지만 운명이 도와주질 않는다.
같은 머슴으로 '구천이'라는 인물이 있다. 원래 이름은 김환이며 '환이'라고 불린다. 이 사람은 원래 머슴은 아니고 실은 최치수의 배다른 동생이며 신분을 숨기고 머슴 노릇을 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김환이 최치수의 아내인 별당아씨와 사랑에 빠져 도주해 버린다. 최치수는 사냥꾼 강포수를 고용하여 김환을 잡기 위해 지리산으로 떠난다. 그리고 최치수는 수동이에게 동행을 명령한다. 수동이는 같이 머슴 생활을 했던 김환에게 동료애가 있었기에 동행하고 싶지 않았지만 주인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된다.
지리산에서 숨어 사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 번째 출사였을까, 드디어 김환을 발견한다. 수동이는 김환이 최치수의 총에 쏘여 죽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김환이가 눈치챌 수 있게 소리를 질러준다. 강포수 역시 노련한 사냥꾼이지만 사람을 사냥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일부러 김환이 도망칠 수 있게 길을 살짝 열어둔다. 김환은 무사히 도망간다. 하지만 멧돼지가 갑작스럽게 출몰하고 수동이의 다리를 치고 간다.
수동이는 심한 상처를 입고 하산을 하게 된다. 몇날며칠을 혼수상태로 보내다 겨우 목숨을 유지하나 다리병신이 되고 만다. 수동이는 자신의 꿈이 무너졌음을 알게 된다. 귀녀와 결혼해서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누가 다리병신과 결혼하고 싶어 할 것인가. 이때부터 수동이는 삐뚤어지기 시작한다. 같은 머슴들이 수동이에게는 고된 일을 빼주지만 수동이는 되려 고함을 지른다. 자기가 병신이라고 무시하냐며. 수동이의 최치수에 대한 원망이 깊고 깊을 것이다.
그러던 날, 최치수는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마을에 역병이 퍼지게 되는데, 최치수 집안의 모든 어른이 사망하고 만다. 최치수의 딸인 서희, 머슴인 길동이와 봉순이, 그리고 몇몇의 하인들이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집안은 최치수의 친척뻘인 조준구 손에 넘어가게 된다. 어린아이들이 무슨 힘이 있을꼬. 모든 권력과 돈이 조준구에게 넘어가며 하인들도 대부분 조준구 편에 서게 된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철저하게 서희 편을 들어주는 하인이 있었다. 바로 '수동이'이다. 수동이는 분명 최치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며, 그의 딸인 서희에게도 마찬가지 감정일 것이다. 나를 다리병신으로 만든 최치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서희를 배신해야 마땅하지만 수동이는 배신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인 서희와 길상이, 봉순이의 편이 되어 주어 다른 머슴들과 싸워준다. 하지만 결국 하동 마을의 서희 일행들은 만주 지역으로 떠나게 되고, 수동이 역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내가 '수동이'라는 인물에 애착이 가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하지 않지만 슬픈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수동이라는 인물을 표현해 내는 장면에서 그의 슬픔이 오렷이 느껴진다. 기구한 운명으로 외롭고 처절한 삶으로 인생을 마무리해야 했던 수동이에게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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