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앤디 워홀은 팝아트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만화풍의 작화를 주로 그렸으며, 아래 그림과 같이 판화 형식으로 색감만을 다르게 하여 찍어 표현하기도 하였다.
책에는 앤디 워홀과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수식어의 깊이가 상당하다. '엄숙주의 탈피, 현대의 대량 생산에 대한 몰개성 표현, 현대인의 자화상, 팝아트의 본질, 소비 문화에 대한 통찰력' 등등 그의 작품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웬만한 철학자 못지 않게 드높다. 나는 앤디 워홀에 대한 이러한 평론에 대해 정말 그러한지 의문이 생긴다. 작품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런 철학적 느낌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향수' 작가로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소설이다. 소설은 단편 형식으로 꽤 짧다. 소설에서 한 화가가 나온다. 이 화가는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어느날 한 평론가가 그의 작품을 평하는데, 재능은 있으나 깊이가 부족하다고 평한다. 화가는 이 평론을 읽는 순간 자신의 작품에 대한 회의와 깊이의 강요에 크나큰 부담을 가지고 되었으며, 다른 사람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죽음 이후 평론가는 화가의 죽음과 그의 작품을 연결지으며, 작품에 상당한 고뇌와 깊이가 담겨있다고 평론한다.
그림은 어디서 나오는가? 화가로부터 나온다. 그러면 그림의 깊이는 누구에게 달려있는 것인가? 당연히 화가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이 소설책에 따르면 깊이는 화가 본인이 아닌 그림을 보는 평론가에게 달려있다. 이것은 말이 안된다. 평론가가 무슨 자격으로 화가의 그림을 평한다는 말인가? 피아노를 쳐보지도 않는 사람이 피아노 테크닉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평론가는 입만 살아있는 무뇌인일 뿐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나는 어떠한 깊이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에 온갖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서 깊이 있는 작픔은 만들었다. 297쪽에서 이 책의 저자는 '빗나간 선이 마돈나의 감정을 기발하게 표현했으며, 앤디 워홀의 의도가 생각이 엿보인다.'고 한다. 이 얼마나 개소린인가. 빗나간 선은 그저 빗나간 선이 뿐이다. 여기에 해석은 필요하지 않다.
한 기자가 김연아에게 무슨 생각을 하며 스트레칭을 하냐고 묻는다. 김연아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한다.
"무슨 생각을 하나요? 그냥 하는 거죠."
카네기홀과 관련된 농담이 있다
"카네기홀은 어떻게 가죠?"
"연습, 연습, 연습"
카네기홀에 가는 방법은 피나는 연습 뿐이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연습이 선행되어야 한다. 음악가들이 연습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아무 생각도 안 할 것이다. 자신의 연주 실력을 더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그냥 연습하는 것이다. 화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슨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릴까? 그냥 그리는 것이다. 화가 역시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스케치와 채색 습작이 있었을 것이며 그리고서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술이라는 특정 예술 영역에는 깊이를 강조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미술에게 깊이를 강요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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