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과학사에 한 획을 그었던 코페루니쿠스의 지동설에 맞먹는 인식의 변환을 철학계에서 보여주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한다. 그의 3대 비판서 중에서 '판단력 비판'은 예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순수이성비판'의 이성과 '실천이성비판'의 종교는 동시에 존립하기 쉽지 않다. 성경을 이성으로 읽고자 한다면 기독교 종교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는 인간 삶의 거대한 축을 이루며 이성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을 채워준다. 이 두 영역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주는 것이 '판단력 비판'이다. '판단력 비판'은 욕망, 예술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상상력이 매우 중요해지는 영역이다. 상상력이라 말도 안 되는 두 개를 연결해 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치 꿈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당연하게 벌어지듯 상상력의 한계는 끝이 없다. 상상력의 힘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무리 없이 연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할 때는 추함이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수학적 숭고이며, 다른 하나는 역학적 숭고이다. 수학적 숭고는 무한함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역학적 숭고는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자연의 거침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의 묘비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묘비에는 칸트의 두 가지 숭고가 표현되어 있다. 하늘의 별은 무한하기에 수학적 숭고를 나타내며,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마주 섰을 때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바로 도덕률이다. 실제로 칸트는 밤하늘의 은하를 발견했으며, 우주는 무한하다고 생각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인간 존재의 무력감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변치 않는 도덕률이다.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를 잘 나타내는 작품이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의 작품이다. 이런 추상적인 현대 미술 작품들을 보면 딱히 아름답게 느껴지지도 않을 뿐더러 누구나 쉽게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들 앞에 서면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눈물의 원천은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의 작품은 매우 거대하다. 거대한 작품 앞에서 서는 우리는 역학적 숭고를 느낄 수 밖에 없다. 거대한 작품 앞에서 나 자신은 초라해진다. 그리고 작품의 평면성에서 무한히 뻗어나가는 색채의 연속성을 느낄 수도 있다. 역시 무한 앞에서 우리는 초라함을 느낀다. 여기서 우리의 감정은 '불쾌'에 해당한다. 이 불쾌의 감정이 '쾌'로 변하기 위해 우리는 상상력이 필요하며 동시에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확인하게 된다. 불쾌가 쾌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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